어떤 사람은 항상 다니는 공간 안에서도 매일 다른 골목길을 찾아 다니며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재미를 즐긴답니다.
그런데 저는 같은 길을 다니며 그 길의 날마다 조금씩 다른 표정을 관찰하길 좋아하는 편이지요.
그런 관찰이 누적되면 짧은 골목길을 지나는 동안에도 계절마다 변하는 풍경들을 담을 수 있고, 어느 가게에 앉아있는 아줌마가 그 집 주인과 어떤 관계인지 또 성격은 어떤 사람인지도 알게되지요.
정류장 가는 길에는 횡단보도가 하나 있고, 그 횡단 보도 맞은 편에는 오래된 부티끄, 만두집, 약국.. 그리고 2층에 죽 전문점 등이 있습니다.
(그 만두집은 젊은 아저씨와 부인, 그리고 부모님이 같이 운영하는 듯한 손만두집인데 큼지막한 만두에 당면과 각종 야채, 고기가 빵빵하게 들어가 있어 왕만두 6개에 4500원이라는 만만치 않은 가격을 받음에도 깔끔하고 좁은 가게의 문 밖에는 항상 기다리는 손님들이 넘쳐납니다. 횡단보도가 옆 블럭에서 그 만두집 앞으로 옮겨지면서 더더욱 장사가 잘 되고 있지요. )
토요일 오후, 그 횡단보도에서 녹색 신호가 켜지길 기다리는 동안의 풍경은 컷 컷 컷.. 일상을 담은 영화의 잔잔한 오프닝 씬 같이 느껴지더군요.
만두집 할머니가 만두를 찌는 솥을 살펴본 후 뚜껑을 닫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고,
그 가게 앞에는 2층 식당에 배달 온 야채 트럭이 잠시 주차를 해놓고 있습니다.
트럭 앞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주황색 티셔츠를 입은 한 미소년이 고개를 들어 눈에 안약을 넣고 있습니다. 참한 손짓으로 안약을 넣고 있는 선이 가는 옆 얼굴은 여린 몸매와 어울려 굉장히 여성적으로 보였습니다.
한 여자가 그 소년 앞을 지나 오래된 부티끄 가게 앞을 걸어갑니다. 토요일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듯한 발걸음이 무거워 보입니다.
밝은 톤의 치마와 5센치 가량의 뮬을 신은 다리로 또각또각 걸어가는 그녀는 오늘 오후에 아무 약속도 없어서 조금 우울해져 있는 게 아닐까..
신호가 녹색으로 바껴 걸어나갈 때 문득 뒤를 돌아보니 퇴근길에 항상 나와있던 뻥튀기 아저씨의 트럭은 보이지 않더군요. 하나에 2천원씩이지만 3개 사면 5천원에도 준답니다. 집앞 뻥튀기 차에서 엄마가 성공했다는 그 방법이 퇴근길 그 뻥튀기 아저씨한테도 먹혔을 때, 뻥튀기계에 암묵적인 승인이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길을 건너 버스를 타기 위해 트럭 앞 그 소년 옆에 저도 섰습니다.
앗 우연히 보게 된 그 소년의 앞모습은 뜻밖에 넙대대합니다. 실망... 이제 미소년은 넙딕이로 강등...
넙딕이 뒤의 트럭에서 야채 아저씨가 박스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챙 넓은 모자를 쓰고 검게 그을린 40대 중반의 아저씨는 무척이나 흥겹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콧노래를 부르며 박스를 한손으로 번쩍 들고 배달을 가는 모습이 씩씩합니다.
아저씨가 2층으로 올라가자 저편에서 젊고 날씬한 여자가 양손에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넙딕이와 제 쪽으로 걸어옵니다.
엄마라고 생각하기엔 젊고 세련된 모습인데, 나이는 관리를 잘한 30대 초반 정도인 거 같군요.
유치원생 정도의 여자 아이가 누나, 2살 정도 아래인 듯한 남자아이가 동생인거 같습니다. 여자아이는 프티챌같은 과일푸딩을 한손에 들고 먹지 않고 입으로 껍질을 잘근잘근 씹으며 걷고 있습니다.
제 앞을 지날 때 여자아이가 건너편을 보고, "황지연~!" 하고 몸집에 안어울리는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를 칩니다. 그리곤 곧 30대초반 여자를 올려보며 "엄마, 지연이!"라고 가리킵니다. 엄마가 맞았군.
건너편을 보니 머리를 귀엽게 묶은 통통한 여자아이가 이쪽을 보고 있습니다. 길을 지나던 참인데 친구에게 발견되었군요.
엄마와 아들 딸은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습니다. 여자애는 자꾸 친구를 보며 "황지연! 너 거기 있어~"라고 소리치고, 건너편의 친구는 "뭐? 여기 있으라구?" 라고 말하며, 친구를 바라본 채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장난을 부립니다.
여자애가 다시 "황지연! 너 거기 있어. 가방에 까미있어!"라고 합니다. 그러자 엄마 손을 붙잡고 있는 남자아이도 "까미 있어~"라고 거듭니다. 동생도 누나의 친구를 아는 모양이죠.
마침 버스가 와서, 넙딕이와 함께 올라탔습니다. 저는 운전석 바로 뒷 자리에 앉았는데 출발한 버스는 한바퀴도 구르기 전에 보행신호에 걸려 다시 섰습니다.
앞 유리창으로 차 앞을 지나 길을 건너는 엄마와 아들딸이 보입니다.
까미라는 게 뭘까? 애완동물인가? 가방에 있다는데 어느 가방. 여자애는 책가방을 메고 신발 주머니 같은 걸 하나 팔에 걸고 있습니다.
건너편 길을 보니 황지연은 사라지고 없네요.
거기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뒷걸음질 장난에 심취해 가버렸나 봅니다.
길을 건넌 엄마와 남동생은 손을 잡은 채 계속 가던 길을 가는데, 여자애는 엄마의 손을 놓고 친구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좌 우를 살핍니다.
그 여자애의 신발 주머니 아래 부분이 둥글게 불룩하네요. 아마 거기에 까미가 들어있나 봅니다.
강아지인지 아니면 토끼인지... 아무튼 까만 놈이니까 까미라고 부르겠지요?
신호가 바껴 차가 출발할 때, 건너편에서 조금 실망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여자애가 보입니다. 지연이에게 까미를 진짜 보여주고 싶었는데 상심했나 봅니다...
'기업은 이익을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망할 것이다.
Comments (2)
아니 어떻게 이렇게... 마음의 눈으로 보이면 이렇게 되나요?
Posted by 이장 | June 30, 2003 9:03 AM
이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별 내용없이 길게 쓴 글 읽는 게 아주 고역이라고 하던데. ㅋㅋ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는 누구나 관심을 갖게 되잖아요. 그걸 보는 게 좋아서 눈여겨 관찰하죠.
Posted by lunatree | June 30, 2003 11:47 PM